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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육룡이 나르샤

선미태미 [그리운 적막]



뭘 원해?
꽃을 원한다면 매일 밤 너의 잠자리에 깔아줄게.
보석을 원한다면 네 눈동자보다 큰 것을 빼앗아줄게.
나라를 원한다면 어딘가의 왕국을 갖게 해줄게.

널 위해서는 뭐든 해줄 거야,
그러니까 어딘가에서 둘이서만 살자.

ㅡ몽환전설, 타치가와 메구미



*



   도망치자.

변성기가 채 오지 않은 앳된 목소리가 공기를 짓누르며 기지개를 폈다. 무언가가 길선미를 두렵게 했다. 답지 않았다. 평소 수수하지만 온화한 미소를 곧잘 짓던 소년이었다. 단단히 굳은 입술을 힘겹게 움직이며 그는 다시 한 번 제 의견을 피력했다. 살덩이가 달싹거릴 때마다 그것이 비쩍 마른 땅처럼 갈라지는 게 무던히도 느껴졌다.



   "도망치자, 태미야. 우리 여기서 나가자."
   "......잠깐만, 뭐? 너 미쳤어? 갑자기 왜 그래?"


길선미는 이제 거의 울고 있었다. 작은 어깨가 위아래로 흔들리며 감정의 격함을 대신 설명해주는 듯했다. 그러자 그의 쌍생아는 진심으로 걱정스럽다는 듯 눈썹을 몇 번 꿈틀거렸다. 옆으로 찢어진 눈두덩에는 시퍼런 분이 짙게 발려 있었다. 길태미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이 퍽 귀찮다는 듯 그것을 익숙하게 왼쪽 어깨로 모아 쓸어넘겼다. 그런 그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금제 귀걸이가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태미야, 저 자는, 이인겸 저 자는 무서운 사람이야. 힘으로 한 사람을 세상에서 영원히 지울 수 있는 사람이라구.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면 사는 의미가 무어겠니, 응? 그러니까...... 그러니까."

   "야, 어르신이 무서우면 무섭다고 말해. 찌질하게 그게 뭐야?"


길태미는 이제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저 고리타분하고 앞일을 내다볼 줄 모르는 아이가 또 시작이구나. 흘긋, 제 형제를 쳐다보는 눈길에는 어느새 차가운 연민만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 난 이인겸이 무서워. 도화전이 무섭고 이인겸이 활개를 치는 이 고려가 무서워. 무서워서 손이 떨리고 서 있을 수가 없어."

   "그래서?"

   "나랑 도망치자. 둘만 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자. 초야에 묻혀서 우리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그런 삶을 살아가자, 태미야."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길태미는 제 몸을 감싸던 옥색 비단을 더욱 단단히 그러쥐었다. 옴팡진 손마디에 하얗게 뼈가 드러났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공기의 냄새로 보아 눈이 올 참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길선미를 오래도록 가만히 바라보았다. 흰옷을 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길선미는 나중에 필히 신선이 될 터였다. 허나 신선 놀음은 이 도화전에서 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하는 놀음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일 뿐, 영겁의 시간 동안 해가 지지 않는 봄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사람. 길선미는 언제나 그를 위해 주었다. 검술을 좋아하는 아우를 위해 겨울 내내 방에 틀어앉아 마른 나무토막으로 목검을 다듬어 주는 형이었고, 행여 동네 친구들과 싸우고 돌아오기라도 하면 두 쪽 모두를 따끔하게 혼내 주는 아버지였고, 항상 따스한 밥을 지어 가장 먼저 길태미의 입 속으로 넣어 주는 어머니였다. 검과 형제는 항상 그들 셋 뿐이었다.

허나 형제는 추억하고 있는 것이 달랐다. 길선미가 따뜻한 봄날의 햇살 아래 앉아 냉이를 캐고 있을 때 길태미는 꽃을 엮어 꽃반지를 만들곤 했다. 행여 짙은 색이 배어 나오는 풀을 찾기라도 하면 길선미는 옷에 물을 들였지만 길태미는 그것을 눈두덩에 발랐다. 설경을 가슴에 담아 두는 것은 언제나 길선미의 몫이었고, 길태미는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몇 시간이고 검과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문득 길태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새어나왔다. 가볍게 고개를 한 번 까닥인 그는 길선미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었다. 자신이 낸 눈썹 상처의 우둘투둘한 살결까지도 볼 수 있었다.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난 권력이 갖고 싶어. 니가 꺾어오던 들판에 핀 꽃들 말고 궁궐의 화려한 꽃들이, 사람들 발에 채이고 채이는 흔한 돌이 아니라 흠이라도 생길까 비단에 고이 싸서 보관하는 보석이, 어딜 가든 환영받지 못하는 삶이 아니라 어쩌면 한 나라도 주무를 수 있는 그 권력이. 그런데 멍청하고 한심하게 도망이나 치자고? 내가 널 따라가면 저걸 다 얻을 수 있는 기횔 놓치는데?"

   "하지만 태미야ㅡ"


아이, 구질구질해! 날카로운 소리가 흩어졌다. 그는 다시금 말을 시작하려던 길선미를 향해 팔을 뻗어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만하라는 무언의 표식이었다. 미간을 가볍게 찌푸린 길태미는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거절을 표했다.


   "갈 거면 너 혼자 가렴."



   길선미는 혼자 떠났다. 그와 말다툼을 한 다음 날이었다. 첫눈이 내린 돌길 위 찍힌 하나의 발자국 덕에 훗날 길태미는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눈이 옷 속으로 스며 베인 듯한 아픔을 연상시켰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길선미가 떠났고, 그는 이미 산을 넘고 있을 것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로 간신히 눈을 감자 익숙한 풍경이 눈 안쪽에 펼쳐졌다. 소복하게 눈이 쌓인 소나무, 너덜거리는 지붕을 고치지 않은 초가집, 그리고 '그'는 그 집 울타리를 넘어 천천히 집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길태미는 제 형제가 보는 광경이 그대로 느껴졌다.

가슴이 돌덩이에 눌린 듯 먹먹하여 숨을 쉴 수 없었다. 바들거리는 몸뚱이가 얼어가고 있다며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허나 목구멍에서 무언가가 긁어댄 까닭에 길태미는 시허연 눈 위에 헛구역질을 해댔다. 퍽 이질적인 감정이었다. 제 것이 아닌 감정이 몸 속으로 들어온 듯했다. 슬픔의 주인은 불 보듯 뻔했고,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었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뒤섞여 숨쉬는 것을 방해했다.

길선미는 자신의 한계에 수치스러워하고 있었다.



*



   행인은 차갑게 식어 있는 길태미를 말끄러미 응시했다. 아마 검을 놓친 순간부터 서로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참한 무인의 말로는 결국 강할수록 각종 무기로 난도질되는 짐승과도 같았다. 잘려진 목을 부여잡고 말로써 썩어가던 고름을 한꺼번에 내뱉는 듯한 행위는 길선미를 탄식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목숨을 건 싸움이지만 선혈이 낭자한 작은 전쟁터를 진심으로 즐기는 아우의 모습은 작은 경외심마저 일으켰다. 허나 이제는 그럴 일이 없음을 몸이 먼저 알았다.


   "이봐요, 거 왜 웃지를 않소? 역적 길태미가 죽었잖소! 이건 나라의 경사요, 경사!"


경사, 경사라. 길선미는 그리 중얼거리며 고요한 몸뚱아리를 바라보았다. 한때 싱그럽게 피어오르던 붉은 뺨은 차가운 시장바닥에 있는 대로 뭉개졌다. 곧이어 덜그럭거리는 달구지가 송장을 치웠기에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달구지를 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적이 드문 골목에 들어서자 길선미는 달구지를 끌던 병사 둘의 앞길을 막았다.


   "누구요, 한시가 급하니 어서 비키시오!"

   "......그거 이리 내놓으시오."

   "뭐요? 보다시피 이건 역적 길태미의 시신이오. 응당 궐로 들여야 하는 것이 맞거늘!"

   "역적? 이젠 웃기지도 않아."


때마침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병사들의 옷깃을 스쳤다.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는지 그들은 서로의 어깨에 의지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신을 꼭 붙들고 있었다. 길선미는 갓을 벗었다.


   "내놓으라 했소이다."




   흘긋, 길선미는 비명을 지르머 도망가는 병사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시신에 덮인 거적때기를 치웠다. 길태미는 눈을 감지 않은 채였다. 가장 좋아하는 장신구로 치장하고, 분을 곱게 바른 눈두덩이와 곧은 이목구비는 살아생전의 그 서슬퍼런 위엄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울컥이며 목구멍 속에서 불덩이가 올라왔다. 그 불덩이는 위아래로 커져 심장과 내장을 삼키고 점점 눈꺼풀로 치달아 오르는 것이었다. 서서히 길태미의 모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아, 나는 왜 너를 데리고 도망치지 못했을까.

발갛게 얼어버린 손가락으로 달구지 손잡이를 그러쥔 길선미는 나릿한 걸음걸이로 집을 향해 걸었다. 눈을 감아도 선명한 길이었다.



*




   "열 손가락 가득 낀 꽃가락지는 하루만 지나도 다 시들어 버려서 속상했는데, 검지손가락 하나에 낀 금가락지는 하루가, 열흘이, 일 년이 지나도 시들지 않아서, 그래서 더 갖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걸 다 손에 쥐었느냐?"

   "당연하지! 지금 내 모습 안 보여? 예쁘지 않아?"

   "그래, 어여쁘구나."

   "아이 참, 진심을 담아서 얘기해 보라구."

   "......"

   "응? 나 예쁘지?"

   "......"


*



   "울지 마, 길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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