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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육룡이 나르샤

[인겸X태미X선미] 사하(駛河) -01.

  사하 (駛河)

 [명사] 말이 달리듯이 물이 급하게 흐르는 강. 


*


   장시의 사람들은 차고 넘쳤다. 가끔씩 아무 사람이나 골라 그 사람의 인생을 추리해내는 탐정 놀음도 했지만 정작 그들의 모습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했다. 생김새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의 지루한 놀음감들, 살아 움직이는 척 하는 목각인형들. 웃고 떠드느라 정신없는 사람들 틈에 나와 같이 우두커니 서 있는 인영(人影)도 문득 눈에 띄었지만 으레 그렇듯 서로를 힐끔 쳐다보는 것이 우리네 인사의 끝인 것이다. 

어둑한 광장을 밝힌 것은 '빨간' 별이었다. 그 누구도 감히 내보일 수 없는, 모두가 가지고 있다고 느낀 '저만의 보물' 이 당차게도 하늘에 똬리를 틀었다. 올려다보는 이들은 경외심에 몸을 떨었지만 정작 저는 푸른 달을 보며 마음을 빼앗겼을 테다. 달의 뒷면에 비친 제 그림자를 보며 꽃단장을 했을 것이다. 녹아드는 손길에 가벼이 흥분을 해 몸을 파르르 떨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도 넘볼 수 없는 화려한 어둠은 아름답게 스몄다. 금빛 자락을 덧댄 붉은 스란치마가 나그네의 바람에 펄럭였다. 저를 올려다보는 이들에게 살풋 웃음짓고는 다시 푸르름을 동경하는 모습이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푸른 눈매를 가진 사내를 두려워하라.
 


   비슷한 색의 사람들, 다른 색의 사랑들, 원색적이고 강렬한 느낌과 그 모든 것을 부드럽게 감싸는 어머니 밤의 냄새. 시린 가을의 달이 하늘을 울릴 때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 깊은 잠 속으로 끝없이 침강했나?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저 너의 찢어진 철릭 조각 뿐이다. 언뜻 그저 붉게만 보이는 비단이지만, 또는 콧날 아래서 빛나는 별이지만, 그저 붉다고 뭉뚱그려 말하기에는 어려운 것은 그 빛이 너무나 고운 탓이다. 연분홍, 분홍, 다홍, 진홍, 자주, 검붉은, 발간... 때로는 어떤 말로도 그 색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벌써 일 년하고도 아흐레 전. 빌어먹을 이인겸의 개가 된 나의 새는 제가 그토록 아름답게 지저귀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애써 과거의 자락을 쥐어 보자면 이인겸이 처음 우리 둘을 만났을 때는 아마 여덟 살 때였을 게다. 비수처럼 꽂히는 수많은 이야기들, 그 웅성거림을 견디지 못한 너와 나는 서로의 손만 꼭 잡고 있었다. 절대로 놓지 않아, 라며 나는 무서워하는 너에게 속삭였기도 했다. 그러자 네가 말했었다.

   "길선미, 너는 날 버리면 안 돼"

내가 어찌 너를 버릴 수 있었겠는가? 허나 결국 새장을 떠난 것은 너였고, 그곳은 네가 바라던 대로 모이가 그득했다. 단순히 어린 날의 변덕이라 치부하기에는 네 욕망이 너무나 컸다. 그 욕망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나 너를 막을 힘이 없었다. 막을 수 없었다. 치켜뜬 눈으로 제 유일한 혈육을 노려보며 다시는 만날 일 없을 거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아이. 아마 나는 너를ㅡ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아 영겁처럼 나릿하게 눈을 감았다.

 
 
   무의식적으로 눈 주위를 비볐다. 옴팡진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살랑거리는 속눈썹은 퍽 이상한 기분을 선사했다. 입에 걸린 쇠스랑이 절걱거리며 힘들게 마디를 만들어 배설하는데, 그 과정이 되려 너무도 자연스럽다. 이상하게도 나는 입 속의 쓸모없는 살덩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첫째, 혀를 살짝 뒤로 뺀다. 입을 벌리고, 소리를 낸다. 길고 부드럽게. 둘째, 앞니의 바로 뒤에 혀를 붙였다 뗀다. 어- 하며 소리를 내고, 그리고, 그리고...... 끝. 다시금 걸림돌이 되는 것은 오랜만에 불러 보는 너의 이름 뿐이다.

   "길태미." 

네가 떠나고 남겨진 하나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안 했다’ 와 ‘못 했다’ 의 차이는 극명하다.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한 철새처럼, 나는 떠돌이였다.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한 철새였다. 어린 네가 했던 손장난이나, 작은 손으로 제법 야무지게 얼굴에 분을 바르며 즐거워했던 모습까지도 세 치 혀를 따라 앉을 곳을 찾지 못했다. 시간은 많이 흘렀고 우리는 무사가 되었다. 너의 소문은 여기까지 들려온다. 삼한 제일검, 길태미.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그래, 그것 뿐이다.


   "저기, 길선미. 흰 얼굴과 붉은 분은 그런대로 볼 만 한 것 같아. 나에게도 잘 어울렸으면 좋겠어." 

네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어느새 좌판의 분을 관심있게 살펴보고 있었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내 얼굴이 비친다. 나와 같은 얼굴을 한 나의 형제여, 우리는 얼굴 빼고는 같은 것이 없어야 한다. 


   "저기, 저기 봐. 삼한 제일검 길태미 수시중 아니야?"

순간 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왕왕 울리는 사람들의 시끄러운 목소리 새로 정확히 울려퍼지는 새된 고함.

   "어디 가?"

얼음장이 깨지는 듯한 칼 소리가 난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고작 두 합 만에 상대는 쓰러진 듯했다. 너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하려 고개를 들었다. 펄럭이는 비단옷, 화려한 머리장식과 푸른 눈매까지. 너는 나를 결코 발견해서는 아니 되지만 나의 경우는 다르다.


   오랜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