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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육룡이 나르샤

태미선미 [나를 죽이는 것은 너여야지]

   나를 죽이는 것은 너여야 하지 않겠니.

***

아득한 가을이 도래했다. 고려 천지 이보다 추운 날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시린 바람이 태미의 몸 속에 파고들었다. 제 발 밑으로 낙엽이 굴러든다. 그것을 태미는 비적거리며 피한다. 답지 않게 사색에 잠기기 쉬운 계절이라 그는 더욱 조심해야 했던 것이다.

시린 손을 부여잡고 제 방에 들어앉았다. 여차하면 화사단이나 가 볼까 했으나 오늘은 별로 끌리지 않았던 탓이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손톱을 다듬는 긴 칼을 꺼내들었다. 사각, 사각. 흰 가루가 되어 떨어지는 제 몸체에 웃음이 새어나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웃기지 않아, 길선미? 올해도 가을을 맞았네. 그 차가운 손으로 칼자루나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길태미는 신경질적으로 칼을 내던졌다. 혹여 얼어 죽지는 않을까, 시답잖은 생각에 빠졌던 저에 혐오스러움을 느낀 태미는 몇 겹으로 바른 창호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다는 충동으로 달아올랐다. 젠장할 후레자식.


달뜬 그를 밖으로 내몬 것은 몸 속에서 치미는 열기였을 게다. 길태미는 그리 진중한 사람이 못 되었다. 제 형제를 생각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그이기에 요즈음 울컥이며 올라오는 생각은 저를 괴멸시키기에 충분했다.

"망할... 망할 길선미."

거울을 마주할 때마다 폭발하는 불길이 제 눈을 감싸는 것을, 그는 똑똑히 볼 수 있다. 눈가의 상처마저 없었더라면 아마 더욱 그랬을 것이다. 길선미, 길선미. 그는 입 속에서 제 형제의 이름을 몇 번이나 굴린다. 혀로 쓰다듬고, 목구멍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그럴 리 없겠지만 혹여 죽는다면 말이지...


그때는 반드시 네가 날 죽여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