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차창작/육룡이 나르샤

인방태미 [입맞춤]

어둠 속에서도 훤히 얼굴이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ㅡ이해인, 황홀한 고백


***


   끊이지 않을 듯하던 왁자한 웃음소리가 거두어지고 홍인방의 저택에는 다시 고요함이 감돌았다. 뒷정리를 하느라 분주했던 하인들마저 일을 끝마치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는 늦은 밤, 길태미는 아른거리는 빛의 춤을 물끄러미 관람했다.

천하의 길태미가 혼자 사색이라, 답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얼마쯤은 괜찮지 않겠냐며 어쩐지 자조적으로 내뱉었을 뿐이다. 세상이 달라졌다. 단순히 한 사람을 밀쳐냈을 뿐인데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했다. 하지만 가장 변한 것은 길태미 자신이었을 게다. 그에게 합하는 어느 순간에도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 동시에 닮고 싶은 인물이기도 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길선미 외에 그를 가장 오래 보았던 사람이었을 뿐더러 사람의 목숨과 관련이 있더라도 자신이 가지고 싶은 무언가를 끝까지 쟁취해내는 모습이 퍽 인상깊었을 터였다.

합하와 함께 있노라면 세상 그 무엇도 무섭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순간 얕은 한숨이 흘러나와 방 안을 덥혔다. 그 넓은 어깨와 당당한 풍채는 다 어디로 갔는지, 어제의 합하께서는 그저 노쇠하고 지친 늙은이였을 뿐이다. 길태미는 그를 지키기 위해서 같은 문파의 사람들 여럿이 모여 있을 때조차 혼자 서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피식, 얕은 조소가 흘러나온다.


   "이인겸."


   음담패설이라도 뱉은 듯 길태미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합하의 성함을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음 속에서 알 수 없는 벌레들이 우글대며 제 머릿속을 집어삼키는 느낌에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칼을 잡아 사람을 죽였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후련하면서도, 두려웠다. 어느 새 제 뒤에서 갈 곳을 잃은 사영(死影)마냥 우두커니 서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를 찾아오는 거야?

홍인방은 제게 평택 평야의 반을 주었다. 그와 함께라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이다. 그와 반대로 합하께서 내뱉는 잔소리가 지난 수십 년간 묵혀져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길래 버린 것 뿐이다. 그의 앞에서 쓰던 어린 아이의 탈이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져 한낱 썩은 나무에 불과해졌을 뿐이다.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거야.


   끼익, 경첩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심연에 잠긴 무사를 깨웠다. 맹수가 판을 치는 숲에서 막 돌아온 듯한 길태미의 얼굴을 멀건히 보고 있던 홍인방이 듣기 좋은 음성으로 먼저 그를 반겼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평소와 달리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길태미였다. 그의 체력이 쉽게 소진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홍인방은 더욱 걱정이 되었을 게다. 가까이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얇은 비단 사이로 느껴지는 살과 근육의 미세한 떨림.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 문득 힘이 들어갔다.


   "나는... 나는 있잖아요, 내가 잘 한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난 어르신을 버렸어요.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홍인방을 쳐다보는 길태미의 눈길은 흡사 간통을 저지른 과부의 그것과 같았다. 홍인방은 잡고 있던 어깨를 놓고 애처로운 허리를 팔로 감쌌다. 삼한 제일검은 변절한 사대부의 품에 무너졌다. 서로의 숨결이 교환되어 다시금 코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그들은 마주보았다. 속눈썹 하나의 가는 떨림마저도 알 수 있었다.


   "아마 당신이 저를 버린 것과 같은 느낌이겠지요."


   완벽한 어둠. 누가 껐는지 모를 촛불은 정처없이 연기를 뿜어내며 어둠을 마신다. 입술이 불에 덴 듯 화끈거리니, 이는 아마 방금의 촛불이 입술에 들어앉았기 때문일 게다.

불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 좋은 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