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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육룡이 나르샤

인방태미인겸 [단말마斷末摩]

그대가 꺾어준 꽃
시들 때까지 들여다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ㅡ이윤학, 첫사랑



***


   뒤뜰로 나와 문득 고개를 드니 높던 하늘은 어둠 때문인지 짙게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하늘 아래 휘청거리는 몸과는 달리 너무나도 안정적이게 손가락 새에서 놀아나는 금제 동곳은 한 번의 손짓에 그 누구라도 저승사자와 만담을 나눌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 나무가 흔들렸다.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은 계절의 최후를 연상케 했다.

뒤틀린 심사는 도통 풀리지를 않았다. 제 집에서 그저 하릴없이 술을 마시다 갑자기 무척이나 보고 싶어진 것은 다름아닌 홍인방의 얼굴이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의 집으로 갈 채비를 했다. 공을 들여 분을 다시 바르고, 가장 좋은 비단옷을 찾았다. 두 벌의 옷이 눈에 들어온다. 흰 바탕에 검은 무늬가 수놓아진 옷, 한없이 붉고 붉은 옷. 손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흰 옷으로 갔다. 허나 무심코 그것을 집으려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두어 번 천을 쓰다듬고,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붉은 옷을 조심스레 걸쳤다.



   "사돈께선 안에 계시니?"

   경박스러운 길태미가 손톱을 고르며 물었다. 그리고 종놈의 답을 듣지도 않은 채 안으로 들었다. 뒤편에서 종놈이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은 그저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아니, 사돈께서 이 시각에 웬일이십니까?"

   "아이, 왜긴요. 우리 사돈과 술이라도 한 잔 할까 하고 왔지요."

   "잘 오셨습니다. 그러면 곧 상을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원하시는 음식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저릿한 감각이 아까 전 비단을 만졌던 손끝을 타고 올라온다. 입은 통제를 잃었다. 혀가 제 마음대로 움직인 탓이다.

   "돼지고기 수육으로 주셔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음식은 곧 차려졌다.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술만 들이키는 길태미가 퍽 이상해 보였던지 홍인방은 그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어머, 사돈께서 제 걱정도 다 해 주시고 영광이어라. 허나 저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런 거짓말이 내게 통할 리가. 홍인방은 온 몸으로 나 무슨 일 있었소ㅡ라고 말하는 길태미를 그저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저를 빤히 쳐다보는 눈길을 느꼈는지 길태미가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왜 그리 보셔요? 화장이 번졌어요?"

피식, 웃으며 홍인방이 장난스레 그의 말을 받아쳤다.

   "예. 절 향한 사돈의 마음이 눈가에 짙게 번지셨습니다."

길태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발갛게 익었다. 마치 짝사랑하는 사내를 정면으로 마주한 여인의 모습이다. 어떡해, 어떡해를 연발하며 소매에 반쯤 덮인 손을 날갯짓하듯 파닥거렸다.


   "우리 너무 취했나 보다. 그렇죠?"


움푹 팬 잇새로 뭉텅하게 잘려 나가던 마디는 간신히 몸체를 찾았다.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곱게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떨리는 입꼬리를 잡아뜯어 위로 올렸다. 영락없이 사내를 홀리는 모양새다.


   답지 않았다. 홍인방이 길태미의 어깨를 거칠게 쥐어 제 쪽으로 끌어당겼던 것이다. 평소 그리도 약하다 놀림받던 사람이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지 길태미로서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수틀린 어깨 속으로 손톱이 파고들어 따끔거린다. 거리가 가까워지며 방 안에는 더운 적막이 감돌았다.

입술이 불에 덴 듯 화끈거린다. 첫인사는 부드러웠지만 인사가 끝난 후에는 인정사정 볼 것 없었다. 농밀하게 입 속을 범하는 침입자에 길태미의 숨은 가빠왔다. 기다란 속눈썹에 눈물이 고이며 죽은 사슴의 그것마냥 파르르 떨렸다. 휘저어짐에 따른 산물이 떼어진 입술을 길게 이어준다.

뜨거워, 뜨거워서 죽을 것 같아.



   "밤이 늦었습니다. 오늘은 저희 집에서 밤을 보내시지요."


   언뜻 들으면 호의였으나 그것은 결코 제안이 아닌 명령이었다. 힘을 잃은 다리를 겨우 추슬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 몸의 감각은 모두 홍인방의 말을 따르라 소리를 지르며 난리법석이었으나 조력자의 힘으로 간신히 그들을 묶어 놓을 수 있었다.


   "미안해요."


다음에 다시 온다는 말도 없었다. 완연한 거절이었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익숙한 문턱을 나서자마자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돌아가 그를 으스러지게 껴안고 싶었다. 그와 하나가 되어 긴 겨울밤을 서로의 온기로 덥히고 싶었다. 지금 당장 그 짓을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먼 옛날, '그'와 그랬던 것처럼. 허나 바들거리는 손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힘들게 발을 옮긴 길태미는 모퉁이를 돌기 전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렸다.


   챙그랑, 금속의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이 잘린 제 귀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벼르고 있던 순간이었다. 허리 뒤편에서 손잡이에 빨간 비단이 감아져 있는 장검 두 자루를 꺼낸 길태미는 살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상대는 예상대로 백윤을 죽인 강창사였다. 필시 홍인방을 죽이러 온 것이리라.

시퍼런 검날이 서로를 향해 겨누어진다. 길태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혔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 느낌에 그는 잠시 흠칫했고, 상대는 그 새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흘러들어왔다.

그는 문득 상대의 검무에서 길선미의 향이 난다고 느꼈다. 춤을 추듯 강하게 흘러내리는 힘의 분산이 반박할 수 없이 제 형제와 닮았다. 저번보다 강해진 듯싶은 상대에 길태미는 칼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옴팡진 손마디가 바스라질 듯 하얗게 빛났다.


   몇 합 가지 않아 길태미의 옷자락이 베어졌다. 상대의 옷자락도 베어진 채였다. 다시금 뛰어올라 검과 검이 맞부딪친다. 앞으로 강하게 내미는 길태미의 검에 상대는 흐르듯 그의 힘을 뒤로 넘겨 버렸다. 그 충격으로 인해 길태미의 동곳이 떨어지며 긴 머리가 풀어졌다. 뜨끈한 액체 또한 오른 눈을 가리며 섬뜩하게 떨어진다. 눈썹이 반으로 갈렸다. 길태미는 이제 길선미가 되었다.

난도질된 비단옷을 걸치고 숨을 몰아쉬는 길태미는 꼴이 말도 아니었다. 여기저기는 상처투성이였으며 칼을 쥔 손은 이미 피가 흥건하게 맺혀 있었다. 여즉 멀쩡한 철릭으로 오른 눈의 선혈을 대충 문질러 닦으며 그는 상대를 살폈다. 상대도 저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잠깐의 재정비 후 다시 한 번 검을 맞대었다.

문득,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여 소매에서 홍인방이 선물해 준 금 동곳을 꺼내 있는 힘껏 공기를 갈랐다.



   "웬 소란이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홍인방은 멀리 들려오는 칼부림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허나 무슨 구경거리라도 있을까 하여 종놈을 대동하고 문턱을 넘었던 게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부러진 검 세 자루와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구는 두 몸뚱이가 보였다. 치워라, 종놈에게 명하던 홍인방의 눈에 익숙한 비단이 띄었다.

홍인방의 동곳은 검은 목에 꽂혔다. 이인겸의 동곳은 붉은 가슴에 꽂혔다.


   더러워요, 가까이 오지 마세요. 죽은 심장은 시퍼런 입술로 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