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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육룡이 나르샤

선미태미 [그리운 적막] 뭘 원해? 꽃을 원한다면 매일 밤 너의 잠자리에 깔아줄게. 보석을 원한다면 네 눈동자보다 큰 것을 빼앗아줄게. 나라를 원한다면 어딘가의 왕국을 갖게 해줄게. 널 위해서는 뭐든 해줄 거야, 그러니까 어딘가에서 둘이서만 살자. ㅡ몽환전설, 타치가와 메구미 * 도망치자. 변성기가 채 오지 않은 앳된 목소리가 공기를 짓누르며 기지개를 폈다. 무언가가 길선미를 두렵게 했다. 답지 않았다. 평소 수수하지만 온화한 미소를 곧잘 짓던 소년이었다. 단단히 굳은 입술을 힘겹게 움직이며 그는 다시 한 번 제 의견을 피력했다. 살덩이가 달싹거릴 때마다 그것이 비쩍 마른 땅처럼 갈라지는 게 무던히도 느껴졌다. "도망치자, 태미야. 우리 여기서 나가자." "......잠깐만, 뭐? 너 미쳤어? 갑자기 왜 그래?" 길선미는 이제 .. 더보기
인방태미인겸 [단말마斷末摩] 그대가 꺾어준 꽃 시들 때까지 들여다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ㅡ이윤학, 첫사랑 *** 뒤뜰로 나와 문득 고개를 드니 높던 하늘은 어둠 때문인지 짙게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하늘 아래 휘청거리는 몸과는 달리 너무나도 안정적이게 손가락 새에서 놀아나는 금제 동곳은 한 번의 손짓에 그 누구라도 저승사자와 만담을 나눌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 나무가 흔들렸다.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은 계절의 최후를 연상케 했다. 뒤틀린 심사는 도통 풀리지를 않았다. 제 집에서 그저 하릴없이 술을 마시다 갑자기 무척이나 보고 싶어진 것은 다름아닌 홍인방의 얼굴이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의 집으로 갈 채비를 했다. 공을 들여 분을 다시 바르고, 가장 좋은 비단옷을 찾았다. 두 벌.. 더보기
인방태미 [입맞춤] 어둠 속에서도 훤히 얼굴이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ㅡ이해인, 황홀한 고백 *** 끊이지 않을 듯하던 왁자한 웃음소리가 거두어지고 홍인방의 저택에는 다시 고요함이 감돌았다. 뒷정리를 하느라 분주했던 하인들마저 일을 끝마치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는 늦은 밤, 길태미는 아른거리는 빛의 춤을 물끄러미 관람했다. 천하의 길태미가 혼자 사색이라, 답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얼마쯤은 괜찮지 않겠냐며 어쩐지 자조적으로 내뱉었을 뿐이다. 세상이 달라졌다. 단순히 한 사람을 밀쳐냈을 뿐인데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했다. 하지만 가장 변한 것은 길태미 자신이었을 게다. 그에게 합하는 어느 순간에도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 동시에 닮고 싶은 .. 더보기
[인겸X태미X선미] 사하(駛河) -01. 사하 (駛河) [명사] 말이 달리듯이 물이 급하게 흐르는 강. * 장시의 사람들은 차고 넘쳤다. 가끔씩 아무 사람이나 골라 그 사람의 인생을 추리해내는 탐정 놀음도 했지만 정작 그들의 모습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했다. 생김새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의 지루한 놀음감들, 살아 움직이는 척 하는 목각인형들. 웃고 떠드느라 정신없는 사람들 틈에 나와 같이 우두커니 서 있는 인영(人影)도 문득 눈에 띄었지만 으레 그렇듯 서로를 힐끔 쳐다보는 것이 우리네 인사의 끝인 것이다. 어둑한 광장을 밝힌 것은 '빨간' 별이었다. 그 누구도 감히 내보일 수 없는, 모두가 가지고 있다고 느낀 '저만의 보물' 이 당차게도 하늘에 똬리를 틀었다. 올려다보는 이들은 경외심에 몸을 떨었지만 정작 저는 푸른 달을 보며 마음을 빼앗겼을.. 더보기
인겸태미 [날] 검이 맞붙기를 몇 합. 화사단에는 깊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수많은 화사단의 무사들 중 단 한 사람도 감히 나서지 못한다. 삼한 제일검과 수 합을 붙을 수 있는 검사? 들어보지도 못했다. 홍륜이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실력에 그들은 모두 입이 닫혔던 게다. 짙게 풍기는 술의 향이 바람과 춤을 춘다. 동시에 검무를 추는 듯 유려하게 움직이는 칼날이 서로를 베어물기 위해 악을 썼다. 길태미가 잠시 비틀거리기를 몇 차례, 보랏빛 옷자락이 움푹 들어가 제 자취를 감추었다. 잔망스런 눈꼬리가 올라가며 그는 제 앞의 사내를 찬찬히 훑었다. 이 정도 검술 실력이면 백윤을 충분히 죽일 수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과연 누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유들해진 입꼬리가 비릿한 호를 그리며 올.. 더보기
선미태미 [물고기는 물을 거스르지 않는다] 갈대가 날리는구나. 어쩌면 너를 다시 볼 지도 모르겠어. 그렇지 않은가? 너는 항상 이맘때면 나를 찾아오니 말이야. 그러니 미리 편지를 써 두지. 가끔은 예감이 썩 잘 맞을 때도 있거든. 완연한 가을이야. 낙엽이 떨어지고, 바람이 부쩍 차졌어. 너는 싫어했었나, 이런 계절. 나는 좋아해. 내내 일만 하던 네가 잠시나마 쉬었던 시간. 말하지 않았나, 어렵다고. 생각을, 기억을 구체화시키는 건 정말 어려워. 난 너처럼 말을 잘 하지 못하니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하지만 글로 쓰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편지라는 게 으레 그러하듯이. 그러니 찢지 말고 끝까지 읽어 주게. 길태미, 너도 칼잡이니 '등을 맡긴다' 는 말이 무언지 잘 알 거야. 더욱이 너는 대단하신 삼한 제일검이니 말이야. 내가 항상 .. 더보기
태미선미 [나를 죽이는 것은 너여야지] 나를 죽이는 것은 너여야 하지 않겠니. *** 아득한 가을이 도래했다. 고려 천지 이보다 추운 날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시린 바람이 태미의 몸 속에 파고들었다. 제 발 밑으로 낙엽이 굴러든다. 그것을 태미는 비적거리며 피한다. 답지 않게 사색에 잠기기 쉬운 계절이라 그는 더욱 조심해야 했던 것이다. 시린 손을 부여잡고 제 방에 들어앉았다. 여차하면 화사단이나 가 볼까 했으나 오늘은 별로 끌리지 않았던 탓이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손톱을 다듬는 긴 칼을 꺼내들었다. 사각, 사각. 흰 가루가 되어 떨어지는 제 몸체에 웃음이 새어나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웃기지 않아, 길선미? 올해도 가을을 맞았네. 그 차가운 손으로 칼자루나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길태미는 신경질적으로 칼을.. 더보기